하늘땅물벗 서강

181001 하늘땅물벗 2주년 서강벗소개

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

작성자
태희 홍
작성일
2018-10-09 16:59
조회
72
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기 1,31)

회칙 요약

[62] 이제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신앙을 통해 말해보려 합니다. 종교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여전히 인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I. 신앙이 주는 빛
[63] 생태 위기는 복합적이고 그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러 민족의 다양한 문화와 전통, 그리고 그들의 내적 삶과 영성에 의지해야 합니다. [64] 이 회칙을 통하여 세계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창조에 관한 책임을 깨닫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II. 성경적 설명의 지혜
[65]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믿음과 그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 31)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습니다(창세 1, 26). 우리는 사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사랑으로 내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가치 있고 특별합니다. 각자가 하느님의 손길 안에 있습니다. 66] 성경은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세 가지 긴밀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해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이웃과 연결되어 있으며, 땅인 지구와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에게 한계가 있고, 우주의 주인도 아니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이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불화를 죄라고 부릅니다.
[67]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인간이 땅을 “지배”하도록 했다는 말을 근거로, 그리스도교가 무분별한 자연 착취를 조장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인정하는 바른 성경 해석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이 땅의 지배 권한을 받았다는 사실이 자연을 마음대로 해도 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세상이라는 정원을 ‘일구고 돌보아야’(창세 2, 15)한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보살피고 보호하며 감독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땅은 주님의 것입니다(시편 24).’
[68] 또한, 우리는 자연의 법칙을 존중해야 합니다. 성경은 땅과 동물을 쉬게 해주어야 하고, 나귀나 소가 넘어져 있으면 거들어 일으켜 주어야 하며, 어린 새나 알이 있는 둥지를 보면 새를 잡아서는 안 된다(신명 22, 4-6)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자의적인 인간 중심주의가 통하지 않습니다.
[69] 성경은 인간이 고유한 존엄과 지성을 지녔기에 모든 피조물이 가진 고유한 가치를 존중할 것을 요청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모든 창조된 동물과 식물 등 피조물이 저마다 고유한 존재를 지니고 있어 고유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얼굴을 반영한다고 가르칩니다.
[70] 구약 성경 이야기들은 우리가 관계를 망쳐 버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줍니다. 카인은 자기 아우를 죽인 후 땅에서 쫓겨납니다. 우리가 한 군데에서 관계를 망쳐버리면, 나 자신과 다른 이, 하느님, 이 땅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망가집니다. 노아 이야기에서 관계가 전체적으로 망가진 세상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세상을 멸망시키시는 것을 봅니다. 71] 율법에서는 이렛날마다 쉬는 안식일과 일곱째 해마다 땅이 쉬는 안식년, 그리고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레위 25, 10) 선포하는 희년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인간들의 상호 관계뿐 아니라 땅과의 관계에 있어서 균형과 공정을 보장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땅을 경작하고 돌보는 이들은 그 결실은 특히 가난한 이들, 과부, 고아, 그리고 이방인들과 공유해야 했습니다.
[72] 시편은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자주 권고하며 또한 다른 모든 피조물도 찬미에 초대합니다(시편 148, 3-5). 73] 예언자들은 우리를 이기심과 죄로부터 끊임없이 구원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이 바로 창조주 하느님이심을 알려줍니다. 74] 바빌론 유배, 로마제국의 박해와 같은 영적인 위기의 때에도 하느님의 자비는 깊은 믿음을 끌어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확신한다면, 우리는 모든 악과 불의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75] 창조주 하느님을 망각하는 영성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중심에 두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고 피조물을 우리 발아래 두려 할 겁니다. 그러나 오직 하느님만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세상의 정원을 가꾸도록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성찰하기
[67]항에서 교종은 인간이 세상의 자원들을 착취하여 마구 사용해 버리는 일방적인 행위를 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바탕으로 이를 비추어 본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74-75]항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하면 비신자들과 함께 하면서도, 하느님 중심으로 생태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III. 세계의 신비
[76]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을 의미하는 ‘창조’는 과학의 탐구 대상인 ‘자연’과 구별되며, 그보다 더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77] 창조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결단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혼돈이나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 온유함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창조 안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78] 무한한 물질의 발전이라는 신화는 이제 인간이 모든 취약한 자연의 보호자로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79] 인간 역사는 자유, 성장, 구원, 사랑 안에서 전개될 수도 있고 타락과 파괴의 길로 전개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류가 자멸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합니다.
[80] 하느님은 우리가 저지른 악행에서도 좋은 결과를 끌어내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가능성으로 우주를 채우시기에, 창조는 우리 앞에 언제나 새로움을 펼쳐 보입니다. 81] 인간은 창조물 중에서도 특별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인격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이와 대화하고 하느님과도 직접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적이고 예술적이며 지성적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창조하심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로 이끄는 특별한 부르심을 주셨습니다. 82] 그러나 이는 다른 생명체가 단지 인간의 지배를 받는 대상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연을 단지 이윤과 이익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관점은 힘센 자가 먼저 자연을 차지해 착취하게 합니다. 대신에 우리는 자연을 보호하는 자연의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83] 인간 아닌 피조물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은 인간과 더불어 공동의 도착점인 하느님을 향해 조화롭고 균형 있고 평화롭게 나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IV. 창조의 조화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전하는 메시지
[84] 인간이 하느님을 닮았다고 내세우면서, 모든 다른 피조물도 저마다 창조의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흙과 물과 산, 모든 창조물은 저마다의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냇가와 산속 혹은 동네에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85] 하느님은 ’창조’라는 소중한 책을 쓰셨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자연은 하느님을 드러내고, 인간은 모든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86] 창조 안의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고 있고, 우리는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서로의 의미를 알아갑니다. 우리를 포함해서 어떤 피조물도 혼자서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87]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을 반영하고 있음을 깨달은 프란치스코 성인은 피조물의 찬가(태양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저의 주님, 찬미 받으소서….” 88] 성령은 모든 피조물 안에 살고 계시므로, 자연 전체가 하느님 현존의 자리입니다.

성찰하기
자연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을 나누어 봅시다. 하느님은 자연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십니까?
프란치스코 성인의 “피조물의 찬가”를 읽고 느낌을 나누어 봅시다.

V. 우주적 친교
[89]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 것이고,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주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토양의 사막화를 우리 몸이 병든 것처럼 느끼고, 동식물 멸종을 우리 몸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여깁니다. 90] 이는 모든 생명체가 동일 수준에 있다고 여겨 인간의 그 고유한 가치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을 내버려 둔 채 인간 이외의 생물 종 보호에 나서는 것도 모순입니다. 비참한 곤경에서 허덕이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허영에 빠져 지구를 파괴할 정도의 엄청난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마치 더 많은 권리를 지니고 태어난 우월한 존재로 여기기도 합니다. 91] 인간에 대한 연민과 배려가 없다면 자연과도 깊은 친교를 올바로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환경 보호는 인간에 대한 참된 사랑과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92]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은 다른 피조물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받습니다. 동물을 학대하면 다른 사람도 학대하게 됩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주적 친교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 사랑으로 서로 엮여 형제, 자매로 일치되어 하느님을 향해 멋진 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VI. 재화의 보편적 목적
[93] 우리가 신앙인이든 아니든 모두 지구가 그 본질에서 공동의 유산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으며, 이는 그 열매가 모든 이에게 유익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사유 재산의 합법적 권리를 옹호하면서, 한편으로 모든 사유 재산에 대한 사회적 부채가 있다는 사실도 가르칩니다. 모든 재화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보편적 목적에 이바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94] 부유한 이와 가난한 이는 동등한 존엄성을 지닙니다. 95] 자연환경은 모든 인류의 유산이며 공공재입니다. 어떤 것이 사유화되더라도 모든 이의 이익을 위해 관리 해야 합니다.

VII. 예수님의 눈길
[96]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보시기에 모든 이들이 중요함을 가르치십니다(루카 12, 6; 마태 6, 26). 97] 예수님은 자주 비유를 통해 창조물의 아름다움에 주의를 기울이셨습니다(요한 4, 35; 마태 13, 31-32). 98] 예수님께서는 피조물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걸 좋아하셨고 삶을 즐기셨습니다. 세상을 결코 경멸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손을 쓰는 일을 하시고 일상 노동의 수고를 알고 계셨습니다. 99]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 16)와 같이 모든 피조물의 운명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100]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1코린 15, 28) 마지막 때로 나아갑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모든 피조물을 신비롭게 간직하시며 충만으로 이끌어 주시어, 들판의 그 꽃과 새들은 이제 그분의 빛나는 현존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성찰하기
예수와 우리의 공동의 집인 지구의 보호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90-91]항을 읽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교종의 이러한 생각과 우리 생활의 어떤 부분이 관련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회칙 해설

“성찬례”(Eucharist)라는 단어는 “감사”(thanksgiving)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왔습니다. 성찬례는 봉헌인데, 미사에서 우리가 봉헌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감사하는 것일까요? 은총에 대한 감사입니다. 우리는 선물을 받았을 때 상대방에게 갚으려 합니까? 아니요. 우리는 그에 감사함으로 응답합니다. 가톨릭 신앙의 정수는 베네딕토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은총의 놀라운 경험”(베네딕토 16세, 「진리 안의 사랑」, 34항)입니다. 우리는 놀라운 무언가를 받았고, 그에 대한 찬미를 노래하고 그것을 주신 분께 감사를 올립니다.
성찬례는 구원이라는 선물을 기념합니다. 그리고 구원은 창조라는 최초의 선물로 돌아가는, 하느님이 그 창조에서 뜻하신 바를 회복하는 사건입니다. 어째서 결국에는 구원할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은 구원할 가치가 있는 걸까요? 왜냐하면, 하느님이 그것들을 창조하셨고, 또 그것들은 선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세상의 놀라운 조화를, 그리고 인간의 발전성을 창조 “해야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 때문에 창조하셨고, 그래서 “창조는 모든 것의 아버지께서 손을 내미시어 주신 선물로, 우리가 함께 우주적 친교를 이루도록 요청하는 사랑으로 비추어진 실재로 이해될 뿐입니다”(76).
하느님의 선물로 창조를 이해하면 기본적인 신학적 믿음-교리-에 신앙의 눈을 뜨게 됩니다. 창조와 그 선함을 설명하면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성경의 이야기를 네 단계로 나눠 그리스도교적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그 네 가지는 창조, 죄, 율법 그리고 마지막 구원과 부활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을 독립된 단편들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교종은 우리가 전체적인 이야기를 보도록 초대하고, 특히 성경의 이야기가 환경 돌봄의 중요성을 보여줌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이 의도하시고, 하느님이 계획하신 이 이야기는 우리가 세상과 우리 삶의 소명을 보도록 초대하는 렌즈입니다.
성경적 지혜로 창조를 설명할 때 교종은 인간의 삶이 하느님, 이웃, 지구 사이의 “긴밀하게 연결된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66). 창조는 간단히 말해 관계성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 창조 이야기 안에 관계성이 극적으로 묘사된 것을 봅니다. 맨 처음에 창조는 밤과 낮, 달과 해, 땅과 하늘과 바다, 동물과 식물, 수컷과 암컷, 모든 것이 관계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조는 조화이고,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연결된 것은 당연합니다!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이 또한 위대한 조화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것을 창조물과 인간의 관계는 어떤가요? 첫 번째 창조 이야기는 “다스림"에 관해 말하는데, 교종은 이것이 절대적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상당히 강조합니다. 결국에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하느님은 절대 폭군이 아닙니다. 교종은 “일구고 돌보는 것”의 이미지를 발전시켜 나가면서 그것을 올바른 인간의 지배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작하고 돌보는 것”, 어떤 학자가 옮겨 적은 것처럼 “섬기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부모 자녀 간에 기대하는 관계와 훨씬 가까운 것으로, 이를 묘사하기 위해 성경은 아담이 모든 동물에게 이름 붙이는 다정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유사하게, 부모가 아이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들의 아들, 딸이 바른길을 가도록 지도할 때 부모는 적절한 권위 혹은 지배를 아이에게 행합니다. 그런데 좋은 부모는 아이를 억압할까요? 우리는 분명히 아니라고 답할 것입니다. 좋은 부모는 여러 방면에서 “주권”을 실천해야 하고 아이의 행복을 북돋워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지구의 안녕에도 적용하도록 초대합니다.

진화에 대한 교리
교회는 진화에 대한 과학적 이론을 적절하게 이해하는 것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과 전적으로 양립할 수 있다고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리서는 “세계와 인간의 기원 문제는 많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러한 연구는 우주의 생성 시기와 크기, 생명체의 등장, 인간의 출현 등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풍부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발견으로 우리는 더욱더 창조주의 위대함을 찬미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83항)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가 이름 모를 필연성의 지배를 받는지” 아니면 하느님에 의해서인지, 왜 악이 존재 하는지 등과 같은 “세계와 인간의 기원 문제”에 대한 질문은 과학이 어느 쪽으로도 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어떻게” 우주가 생성 되었는지 알려줄 뿐, “왜” 생성되었는지는 알려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교종은 또 다른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연결점을 언급합니다.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첫 번째는 교종의 단호한 문장 즉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67)에 드러납니다. 우리는 창조주가 아닙니다. 우리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고, 관리인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지 소유주로 부름을 받은 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적 소유에 대한 인간의 청구를 모두 거절하십니다”(67). 피조물의 질서를 존중하는 것은 창조자이자 궁극적인 소유자인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망각하는 영성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75). 우리가 하느님의 선물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표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우리는 “우리의 힘을 이끌고 발전시키고 제한하는 현명한 방법”(78)을 계발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역동적인 “질서”가 필요하며, 교종이 자연을 “관계와 참여”의 “열린 의사소통 체계”라고 설명한 것은 그 체계가 단순히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무한정 변화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의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아니고, 지구에 절대적 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이 관점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어쩌면 지구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자원의 착취를 신속하게 줄이는 것입니다. 숲을 보존하고, 석탄과 석유를 땅속에 두고, 저수지와 지하층의 물을 그대로 두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들은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하고, 그 법칙은 정부가 미래 세대를 위해 현명하고 지속 가능한 자원 사용 규정을 만드는 데 있어 지침이 되어야만 합니다.
교종이 말하는 두 번째는 다른 피조물과 하느님의 관계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각기 기능이 있고 그 어느 것도 필요 없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84).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그 존재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로 하느님을 향한 소명이 있습니다. 이 회칙 전체를 통해 교종 프란치스코는 시편 148편과 같이 시편을 인용하는데, 시편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심지어 거센 바람이나 바위와 같은 것을 통해서도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일부 비그리스도교들은 창조가 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데, 교종은 유다-그리스도교의 사유가 “자연의 탈신화화”(78)를 이끌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피조물은 신격화 될 수 없지만 여전히 하느님이 부여한 자신만의 목적을 부여받았고, 이는 단순히 인간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과 자연물이 저마다의 풍성함을 통해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교종은 독일 주교님들이 이것을 “효용성보다는 존재가 우선하는 것”이라 불렀다고 적었습니다(69).
자연물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풍요롭게 놔두는 것의 중요성을 받아들이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자연계에서 분리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쉽게 이를 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대부분은 소를 상상할 수 있죠. 소는 무얼 하나요? 소는 들판에서 풀을 뜯고, 음매 하고 울고, 똥을 많이 쌉니다. 물론 가축화된 소는 사람에 의해 길러지지만, 여전히 그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햄버거로 먹은 소는 만족할만한 삶을 살았을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잘 사육된 좋은 육질의 소고기라고 광고하는 프리미엄 햄버거를 사지 않았다면, 아마 그 소는 삶 대부분을 동물 집단 사육시설(CAFO)에서 보냈을 것입니다. 동물 집단 사육시설에서는 소가 진흙과 분뇨 위에서 수백 마리의 다른 소들과 함께 살고, 소에게는 맞지 않는 먹이인 옥수수를 강제로 먹으며, 밀집되어 사육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질병에 위협을 당하고, 한 번에 수많은 항생제를 처방받고, 그런 다음 도살장으로 끌려갑니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소를 먹는 게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것은 우리가 소를 언제든 저렴하게 먹으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우리는 가장 저비용으로 많은 소고기를 얻기 위해 어떻게 하면 소의 생명을 맘대로 할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이것은 소가 소로 존재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하게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건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창조가 관계의 조화라면, “죄”는 그러한 관계의 불화이기 때문입니다(66). 규칙을 깨는 것이 죄의 주요점이 아닙니다. 규칙은 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불화 때문에 관계가 깨어질 때 일어나는 일들을 죄라고 부른다는 점을, 그리고 그러한 일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불화가 일어난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피조물 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불화는 하느님의 의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입니다. 회칙의 맨 처음에서 교종은 이 점을 고통스럽지만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누이인 지구를 마음대로 약탈할 권리가 부여된 주인과 소유주를 자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죄로 상처 입은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폭력은 흙과 물과 공기와 모든 생명체의 병리 증상에도 드러나고 있습니다”(2). 죄는 우리가 지구의 먼지라는 사실을 잊을 때 지구에 가하는 폭력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인간이 분석, 이해, 통제하는 체계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서, 그리고 “우주적 친교”(76)의 요청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죄는 금지된 열매로 나타난 하느님의 권능을 질투해 따먹는 것으로 상징화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 관계를 단절하기로 합니다. 우리는 지배를 원합니다.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이 지배 욕망을 보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아이들을 물건처럼 다룹니다.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을 일회용 기계처럼 다룹니다. 마치 요한 바오로 2세가 회칙 「노동하는 인간」에서 경고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느님 혹은 종교를 우상으로 뒤바꿀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를 해치는 것이 항상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교종은 동방정교회의 지도자인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의 말을 빌려 이러한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자연 세계에 저지른 죄는 우리 자신과 하느님을 거슬러 저지른 죄”(8)입니다. 가능한 한 명확하게, 교종은 우리가 이러한 연결을 보길 원합니다. 바로 지구와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도 깨뜨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사랑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형식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교종은 다음 장에서 현대 세계의 죄에 대해 할 말이 더 많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교종은 우리에게 다음 문장을 상기시키기 위해 애씁니다. 바로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일하기를 바라시며 우리의 협력을 기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에서도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실 수 있습니다”(80). 왜냐하면, 맨 처음부터 하느님의 성령은 모든 것에 현존하셨고, “이 세계를 가능성으로 가득 채우시었기에…언제나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80). 감사하게도, “불의는 무적이 아닌 것”(74)이고 “희망을 되찾는 데에는 의로운 한 사람으로 충분합니다!”(71)
성경의 나머지는 하느님이 점점 이 부서진 관계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협력을 통해서 말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모든 일을 원활하게 하려고 우주적인 마법을 행한다면, 수 세기에 걸쳐 쓰인 많은 책 중에 한 권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훌륭한 부모와 같은 하느님은 심지어 떼쓰는 아이에게서도 가장 좋은 것을 끌어내려 애쓰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하실까요?
하느님이 사용하는 기초적인 도구는 사람들과 계약을 맺는 것, 그리고 사회를 다스리는 규칙들과 계약을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율법은 깨어진 관계를 복구하고, 불화가 아니라 조화 안에서 사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 선물이자 지식이어서 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구절이 시편에도 여러 번 반복됩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시는데 그것은 구원을 위한 시험이 아니라 (하느님은 율법을 주시기 이전에! 이미 그들을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들의 삶을 위한 규율이었습니다. 그 규율은 이스라엘 백성 공동의 삶이라는 빛나는 예시에 따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 이 땅의 모든 민족은 그의 자손들이 축복받았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율법을 십계명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완전히 생태적입니다. 교종은 율법이 “[하느님께서] 직접 자연에 새겨놓으신 순환의 재발견과 존중이 동반된다는 것”, “다른 이들과 맺은 관계와 그들이 살고 일하는 땅과 맺은 관계의 균형과 공정”을 보장해주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말합니다(71).
교종이 말하는 율법의 두 가지 생태적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한 강조입니다. 안식일은 휴식의 날로, 이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 받은 선물이라는 생각을 드높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막에서 이스라엘에 천상의 만나를 주셨을 때,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둬들일 수 없었고 이것은 하느님이 충분히 주실 거라는 신뢰의 표징이었습니다(탈출 16, 25-27). 심지어 땅도 안식의 해를 받았고, 교종은 이것이 최고의 생태적 실천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땅의 전적인 소유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고리대금 금지와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가족들에게 땅을 되돌려주는 것을 포함해서, 다양한 율법 조항을 통해 하느님은 더 큰 목표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소수의 사람에게 막대한 땅(부)의 축적이 돌아가는 걸 제한하는 것입니다. 대신에 땅은 분배되어야 하고, 소유권이 있다 하더라도 공유되어야 합니다. 다른 법들도 이런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구석진 땅의 곡식은 “가난한 이와 이방인”이 주울 수 있도록 수확하지 않은 채로 남겨두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19, 9-10).
율법의 구체적인 요구는 예수님을 통해 완성에 도달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지 않고 완성하십니다. 물질적 소유에 대한 법과 관련해, 가톨릭은 이를 “재화의 보편적 목적”(93)으로 압축해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지구의 모든 재화가 모든 이에게 자유로이 공유되도록 의도하셨고, 율법은 죄 많은 인간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독려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교적 전통은 이 권리[소유권, 재산권]를 절대적이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결코 고집하지 않았”고, 오히려 “창조된 모든 재화를 사용하는 것은 모든 이의 공동 권리라는 넓은 의미에서 항상 이해되어 왔다”고 설명합니다(요한 바오로 2세, 「노동하는 인간」, 14항). 프란치스코 교종은 재화의 보편적 목적을 “사회 활동의 ‘황금률”이자 “윤리적 사회적 질서 전체의 제1 원리”(93)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것이 예수님의 명령들 안에서 생생하게 묘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유롭게 가진 것을 나누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말씀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닮으려 했던 것임을 기억합시다.
그렇다면 이런 가르침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프란치스코 교종의 글에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첫째로, 우리는 소비주의 습관을 끊어내야 합니다. 우리가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고, 버리고 더 많이 사는 습관 말입니다. 이는 공유해야 할 것들을 낭비하면서, 우리 자신을 위해 물질적 풍요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습관을 포기할 수 있다면, 두 번째로 우리는 분배 정의에 대한 요청에 자유로이 응답할 수 있을 겁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오늘날의 세계 경제를 비판하면서, “힘이 정의”라는 관점이 “엄청난 불평등”을 초래한다고 지적합니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시하신 조화, 정의, 형제애, 평화의 이상”에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82). 분배 정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응당 받아야 하는 것, 그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단지 생존할만한 수준이 아니라 인간 자체로서의 풍족함에 관한 것입니다. 잘 살기 위해서 우리는 빵이나 물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함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휴식과 양질의 노동환경, 교육을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분배 정의가 모든 사람이 획일적인 평등함을 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몇몇 사람이 “충분함”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고, 세계에서 그보다 많은 사람이 정말 필요한 것보다 훨씬 적게 가지고 있는 불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세계 경제 구조는 모두를 위한 부의 순환을 지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제 구조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라는 원칙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종이 자주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는 탐욕을 우상화하는, 이미 부를 가진 사람이 극한의 부를 축적하게 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전의 한 회칙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도덕적 삶의 초상으로서 예수님을 만난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따르려면, 아니, 우리가 가진 전부를 주라는 예수님의 더 깊은 요구를 따르려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의 소유를 포기해야 할까요?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떠나갔다고 끝맺는데, 그는 포기할 준비가 덜 되었던 것입니다(마태 19, 22). 하느님, 이웃, 지구와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는 발전한 국가에 사는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줍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는 소유물을 포기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슬퍼하면서 떠나갈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종은 일상적 영성 안에서 우리가 희망을 품도록 북돋우며 예수님의 평화로운 시선에 관한 묵상으로 끝맺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목표는 종종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라는 열망을 통해 표현됩니다. 시편 저자는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강복하소서. 당신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소서(시편 67, 2)” 그리고 교종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을 직접 봤다는 걸 상기시켜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어려움이 있을 때 피하지 마십시오.

일상을 위한 질문들

1. 일상에서 우리는 창조의 아름다움이라는 선물의 가치를 잘 알아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자연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선물로 여길 수 있을까요? 우리가 알게 된 아름다움에 대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려 노력해봅시다.

2. “재화의 보편적 목적”을 지향하기 위하여, 소유와 재산을 사용하는 나의 관점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이웃들과 더 많이 나눌 방법을 찾아봅시다.

3. 주변을 돌아봤을 때, 모든 피조물이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작은 것이라도 내가 피조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내 행동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기도하기
(요한 14,6-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날 준비를 하실 때, 필립보는 예수님께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하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을 통하여 하느님을 봅니까? 그분이 우리 삶을 바라볼 때 우리가 그분의 얼굴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 지에 관하여 묵상합시다. 고통받는 피조물들과 가난한 이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을 알도록 도와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드립시다.
전체 0

181001 하늘땅물벗 2주년 서강벗소개

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

작성자
태희 홍
작성일
2018-10-09 16:59
조회
72
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기 1,31)

회칙 요약

[62] 이제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신앙을 통해 말해보려 합니다. 종교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여전히 인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I. 신앙이 주는 빛
[63] 생태 위기는 복합적이고 그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러 민족의 다양한 문화와 전통, 그리고 그들의 내적 삶과 영성에 의지해야 합니다. [64] 이 회칙을 통하여 세계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창조에 관한 책임을 깨닫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II. 성경적 설명의 지혜
[65]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믿음과 그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 31)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습니다(창세 1, 26). 우리는 사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사랑으로 내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가치 있고 특별합니다. 각자가 하느님의 손길 안에 있습니다. 66] 성경은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세 가지 긴밀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해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이웃과 연결되어 있으며, 땅인 지구와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에게 한계가 있고, 우주의 주인도 아니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이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불화를 죄라고 부릅니다.
[67]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인간이 땅을 “지배”하도록 했다는 말을 근거로, 그리스도교가 무분별한 자연 착취를 조장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인정하는 바른 성경 해석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이 땅의 지배 권한을 받았다는 사실이 자연을 마음대로 해도 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세상이라는 정원을 ‘일구고 돌보아야’(창세 2, 15)한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보살피고 보호하며 감독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땅은 주님의 것입니다(시편 24).’
[68] 또한, 우리는 자연의 법칙을 존중해야 합니다. 성경은 땅과 동물을 쉬게 해주어야 하고, 나귀나 소가 넘어져 있으면 거들어 일으켜 주어야 하며, 어린 새나 알이 있는 둥지를 보면 새를 잡아서는 안 된다(신명 22, 4-6)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자의적인 인간 중심주의가 통하지 않습니다.
[69] 성경은 인간이 고유한 존엄과 지성을 지녔기에 모든 피조물이 가진 고유한 가치를 존중할 것을 요청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모든 창조된 동물과 식물 등 피조물이 저마다 고유한 존재를 지니고 있어 고유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얼굴을 반영한다고 가르칩니다.
[70] 구약 성경 이야기들은 우리가 관계를 망쳐 버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줍니다. 카인은 자기 아우를 죽인 후 땅에서 쫓겨납니다. 우리가 한 군데에서 관계를 망쳐버리면, 나 자신과 다른 이, 하느님, 이 땅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망가집니다. 노아 이야기에서 관계가 전체적으로 망가진 세상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세상을 멸망시키시는 것을 봅니다. 71] 율법에서는 이렛날마다 쉬는 안식일과 일곱째 해마다 땅이 쉬는 안식년, 그리고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레위 25, 10) 선포하는 희년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인간들의 상호 관계뿐 아니라 땅과의 관계에 있어서 균형과 공정을 보장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땅을 경작하고 돌보는 이들은 그 결실은 특히 가난한 이들, 과부, 고아, 그리고 이방인들과 공유해야 했습니다.
[72] 시편은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자주 권고하며 또한 다른 모든 피조물도 찬미에 초대합니다(시편 148, 3-5). 73] 예언자들은 우리를 이기심과 죄로부터 끊임없이 구원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이 바로 창조주 하느님이심을 알려줍니다. 74] 바빌론 유배, 로마제국의 박해와 같은 영적인 위기의 때에도 하느님의 자비는 깊은 믿음을 끌어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확신한다면, 우리는 모든 악과 불의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75] 창조주 하느님을 망각하는 영성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중심에 두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고 피조물을 우리 발아래 두려 할 겁니다. 그러나 오직 하느님만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세상의 정원을 가꾸도록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성찰하기
[67]항에서 교종은 인간이 세상의 자원들을 착취하여 마구 사용해 버리는 일방적인 행위를 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바탕으로 이를 비추어 본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74-75]항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하면 비신자들과 함께 하면서도, 하느님 중심으로 생태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III. 세계의 신비
[76]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을 의미하는 ‘창조’는 과학의 탐구 대상인 ‘자연’과 구별되며, 그보다 더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77] 창조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결단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혼돈이나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 온유함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창조 안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78] 무한한 물질의 발전이라는 신화는 이제 인간이 모든 취약한 자연의 보호자로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79] 인간 역사는 자유, 성장, 구원, 사랑 안에서 전개될 수도 있고 타락과 파괴의 길로 전개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류가 자멸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합니다.
[80] 하느님은 우리가 저지른 악행에서도 좋은 결과를 끌어내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가능성으로 우주를 채우시기에, 창조는 우리 앞에 언제나 새로움을 펼쳐 보입니다. 81] 인간은 창조물 중에서도 특별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인격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이와 대화하고 하느님과도 직접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적이고 예술적이며 지성적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창조하심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로 이끄는 특별한 부르심을 주셨습니다. 82] 그러나 이는 다른 생명체가 단지 인간의 지배를 받는 대상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연을 단지 이윤과 이익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관점은 힘센 자가 먼저 자연을 차지해 착취하게 합니다. 대신에 우리는 자연을 보호하는 자연의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83] 인간 아닌 피조물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은 인간과 더불어 공동의 도착점인 하느님을 향해 조화롭고 균형 있고 평화롭게 나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IV. 창조의 조화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전하는 메시지
[84] 인간이 하느님을 닮았다고 내세우면서, 모든 다른 피조물도 저마다 창조의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흙과 물과 산, 모든 창조물은 저마다의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냇가와 산속 혹은 동네에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85] 하느님은 ’창조’라는 소중한 책을 쓰셨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자연은 하느님을 드러내고, 인간은 모든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86] 창조 안의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고 있고, 우리는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서로의 의미를 알아갑니다. 우리를 포함해서 어떤 피조물도 혼자서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87]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을 반영하고 있음을 깨달은 프란치스코 성인은 피조물의 찬가(태양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저의 주님, 찬미 받으소서….” 88] 성령은 모든 피조물 안에 살고 계시므로, 자연 전체가 하느님 현존의 자리입니다.

성찰하기
자연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을 나누어 봅시다. 하느님은 자연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십니까?
프란치스코 성인의 “피조물의 찬가”를 읽고 느낌을 나누어 봅시다.

V. 우주적 친교
[89]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 것이고,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주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토양의 사막화를 우리 몸이 병든 것처럼 느끼고, 동식물 멸종을 우리 몸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여깁니다. 90] 이는 모든 생명체가 동일 수준에 있다고 여겨 인간의 그 고유한 가치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을 내버려 둔 채 인간 이외의 생물 종 보호에 나서는 것도 모순입니다. 비참한 곤경에서 허덕이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허영에 빠져 지구를 파괴할 정도의 엄청난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마치 더 많은 권리를 지니고 태어난 우월한 존재로 여기기도 합니다. 91] 인간에 대한 연민과 배려가 없다면 자연과도 깊은 친교를 올바로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환경 보호는 인간에 대한 참된 사랑과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92]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은 다른 피조물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받습니다. 동물을 학대하면 다른 사람도 학대하게 됩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주적 친교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 사랑으로 서로 엮여 형제, 자매로 일치되어 하느님을 향해 멋진 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VI. 재화의 보편적 목적
[93] 우리가 신앙인이든 아니든 모두 지구가 그 본질에서 공동의 유산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으며, 이는 그 열매가 모든 이에게 유익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사유 재산의 합법적 권리를 옹호하면서, 한편으로 모든 사유 재산에 대한 사회적 부채가 있다는 사실도 가르칩니다. 모든 재화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보편적 목적에 이바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94] 부유한 이와 가난한 이는 동등한 존엄성을 지닙니다. 95] 자연환경은 모든 인류의 유산이며 공공재입니다. 어떤 것이 사유화되더라도 모든 이의 이익을 위해 관리 해야 합니다.

VII. 예수님의 눈길
[96]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보시기에 모든 이들이 중요함을 가르치십니다(루카 12, 6; 마태 6, 26). 97] 예수님은 자주 비유를 통해 창조물의 아름다움에 주의를 기울이셨습니다(요한 4, 35; 마태 13, 31-32). 98] 예수님께서는 피조물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걸 좋아하셨고 삶을 즐기셨습니다. 세상을 결코 경멸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손을 쓰는 일을 하시고 일상 노동의 수고를 알고 계셨습니다. 99]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 16)와 같이 모든 피조물의 운명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100]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1코린 15, 28) 마지막 때로 나아갑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모든 피조물을 신비롭게 간직하시며 충만으로 이끌어 주시어, 들판의 그 꽃과 새들은 이제 그분의 빛나는 현존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성찰하기
예수와 우리의 공동의 집인 지구의 보호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90-91]항을 읽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교종의 이러한 생각과 우리 생활의 어떤 부분이 관련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회칙 해설

“성찬례”(Eucharist)라는 단어는 “감사”(thanksgiving)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왔습니다. 성찬례는 봉헌인데, 미사에서 우리가 봉헌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감사하는 것일까요? 은총에 대한 감사입니다. 우리는 선물을 받았을 때 상대방에게 갚으려 합니까? 아니요. 우리는 그에 감사함으로 응답합니다. 가톨릭 신앙의 정수는 베네딕토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은총의 놀라운 경험”(베네딕토 16세, 「진리 안의 사랑」, 34항)입니다. 우리는 놀라운 무언가를 받았고, 그에 대한 찬미를 노래하고 그것을 주신 분께 감사를 올립니다.
성찬례는 구원이라는 선물을 기념합니다. 그리고 구원은 창조라는 최초의 선물로 돌아가는, 하느님이 그 창조에서 뜻하신 바를 회복하는 사건입니다. 어째서 결국에는 구원할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은 구원할 가치가 있는 걸까요? 왜냐하면, 하느님이 그것들을 창조하셨고, 또 그것들은 선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세상의 놀라운 조화를, 그리고 인간의 발전성을 창조 “해야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 때문에 창조하셨고, 그래서 “창조는 모든 것의 아버지께서 손을 내미시어 주신 선물로, 우리가 함께 우주적 친교를 이루도록 요청하는 사랑으로 비추어진 실재로 이해될 뿐입니다”(76).
하느님의 선물로 창조를 이해하면 기본적인 신학적 믿음-교리-에 신앙의 눈을 뜨게 됩니다. 창조와 그 선함을 설명하면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성경의 이야기를 네 단계로 나눠 그리스도교적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그 네 가지는 창조, 죄, 율법 그리고 마지막 구원과 부활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을 독립된 단편들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교종은 우리가 전체적인 이야기를 보도록 초대하고, 특히 성경의 이야기가 환경 돌봄의 중요성을 보여줌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이 의도하시고, 하느님이 계획하신 이 이야기는 우리가 세상과 우리 삶의 소명을 보도록 초대하는 렌즈입니다.
성경적 지혜로 창조를 설명할 때 교종은 인간의 삶이 하느님, 이웃, 지구 사이의 “긴밀하게 연결된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66). 창조는 간단히 말해 관계성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 창조 이야기 안에 관계성이 극적으로 묘사된 것을 봅니다. 맨 처음에 창조는 밤과 낮, 달과 해, 땅과 하늘과 바다, 동물과 식물, 수컷과 암컷, 모든 것이 관계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조는 조화이고,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연결된 것은 당연합니다!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이 또한 위대한 조화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것을 창조물과 인간의 관계는 어떤가요? 첫 번째 창조 이야기는 “다스림"에 관해 말하는데, 교종은 이것이 절대적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상당히 강조합니다. 결국에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하느님은 절대 폭군이 아닙니다. 교종은 “일구고 돌보는 것”의 이미지를 발전시켜 나가면서 그것을 올바른 인간의 지배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작하고 돌보는 것”, 어떤 학자가 옮겨 적은 것처럼 “섬기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부모 자녀 간에 기대하는 관계와 훨씬 가까운 것으로, 이를 묘사하기 위해 성경은 아담이 모든 동물에게 이름 붙이는 다정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유사하게, 부모가 아이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들의 아들, 딸이 바른길을 가도록 지도할 때 부모는 적절한 권위 혹은 지배를 아이에게 행합니다. 그런데 좋은 부모는 아이를 억압할까요? 우리는 분명히 아니라고 답할 것입니다. 좋은 부모는 여러 방면에서 “주권”을 실천해야 하고 아이의 행복을 북돋워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지구의 안녕에도 적용하도록 초대합니다.

진화에 대한 교리
교회는 진화에 대한 과학적 이론을 적절하게 이해하는 것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과 전적으로 양립할 수 있다고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리서는 “세계와 인간의 기원 문제는 많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러한 연구는 우주의 생성 시기와 크기, 생명체의 등장, 인간의 출현 등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풍부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발견으로 우리는 더욱더 창조주의 위대함을 찬미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83항)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가 이름 모를 필연성의 지배를 받는지” 아니면 하느님에 의해서인지, 왜 악이 존재 하는지 등과 같은 “세계와 인간의 기원 문제”에 대한 질문은 과학이 어느 쪽으로도 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어떻게” 우주가 생성 되었는지 알려줄 뿐, “왜” 생성되었는지는 알려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교종은 또 다른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연결점을 언급합니다.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첫 번째는 교종의 단호한 문장 즉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67)에 드러납니다. 우리는 창조주가 아닙니다. 우리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고, 관리인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지 소유주로 부름을 받은 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적 소유에 대한 인간의 청구를 모두 거절하십니다”(67). 피조물의 질서를 존중하는 것은 창조자이자 궁극적인 소유자인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망각하는 영성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75). 우리가 하느님의 선물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표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우리는 “우리의 힘을 이끌고 발전시키고 제한하는 현명한 방법”(78)을 계발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역동적인 “질서”가 필요하며, 교종이 자연을 “관계와 참여”의 “열린 의사소통 체계”라고 설명한 것은 그 체계가 단순히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무한정 변화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의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아니고, 지구에 절대적 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이 관점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어쩌면 지구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자원의 착취를 신속하게 줄이는 것입니다. 숲을 보존하고, 석탄과 석유를 땅속에 두고, 저수지와 지하층의 물을 그대로 두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들은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하고, 그 법칙은 정부가 미래 세대를 위해 현명하고 지속 가능한 자원 사용 규정을 만드는 데 있어 지침이 되어야만 합니다.
교종이 말하는 두 번째는 다른 피조물과 하느님의 관계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각기 기능이 있고 그 어느 것도 필요 없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84).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그 존재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로 하느님을 향한 소명이 있습니다. 이 회칙 전체를 통해 교종 프란치스코는 시편 148편과 같이 시편을 인용하는데, 시편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심지어 거센 바람이나 바위와 같은 것을 통해서도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일부 비그리스도교들은 창조가 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데, 교종은 유다-그리스도교의 사유가 “자연의 탈신화화”(78)를 이끌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피조물은 신격화 될 수 없지만 여전히 하느님이 부여한 자신만의 목적을 부여받았고, 이는 단순히 인간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과 자연물이 저마다의 풍성함을 통해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교종은 독일 주교님들이 이것을 “효용성보다는 존재가 우선하는 것”이라 불렀다고 적었습니다(69).
자연물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풍요롭게 놔두는 것의 중요성을 받아들이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자연계에서 분리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쉽게 이를 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대부분은 소를 상상할 수 있죠. 소는 무얼 하나요? 소는 들판에서 풀을 뜯고, 음매 하고 울고, 똥을 많이 쌉니다. 물론 가축화된 소는 사람에 의해 길러지지만, 여전히 그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햄버거로 먹은 소는 만족할만한 삶을 살았을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잘 사육된 좋은 육질의 소고기라고 광고하는 프리미엄 햄버거를 사지 않았다면, 아마 그 소는 삶 대부분을 동물 집단 사육시설(CAFO)에서 보냈을 것입니다. 동물 집단 사육시설에서는 소가 진흙과 분뇨 위에서 수백 마리의 다른 소들과 함께 살고, 소에게는 맞지 않는 먹이인 옥수수를 강제로 먹으며, 밀집되어 사육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질병에 위협을 당하고, 한 번에 수많은 항생제를 처방받고, 그런 다음 도살장으로 끌려갑니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소를 먹는 게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것은 우리가 소를 언제든 저렴하게 먹으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우리는 가장 저비용으로 많은 소고기를 얻기 위해 어떻게 하면 소의 생명을 맘대로 할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이것은 소가 소로 존재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하게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건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창조가 관계의 조화라면, “죄”는 그러한 관계의 불화이기 때문입니다(66). 규칙을 깨는 것이 죄의 주요점이 아닙니다. 규칙은 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불화 때문에 관계가 깨어질 때 일어나는 일들을 죄라고 부른다는 점을, 그리고 그러한 일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불화가 일어난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피조물 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불화는 하느님의 의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입니다. 회칙의 맨 처음에서 교종은 이 점을 고통스럽지만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누이인 지구를 마음대로 약탈할 권리가 부여된 주인과 소유주를 자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죄로 상처 입은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폭력은 흙과 물과 공기와 모든 생명체의 병리 증상에도 드러나고 있습니다”(2). 죄는 우리가 지구의 먼지라는 사실을 잊을 때 지구에 가하는 폭력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인간이 분석, 이해, 통제하는 체계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서, 그리고 “우주적 친교”(76)의 요청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죄는 금지된 열매로 나타난 하느님의 권능을 질투해 따먹는 것으로 상징화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 관계를 단절하기로 합니다. 우리는 지배를 원합니다.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이 지배 욕망을 보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아이들을 물건처럼 다룹니다.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을 일회용 기계처럼 다룹니다. 마치 요한 바오로 2세가 회칙 「노동하는 인간」에서 경고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느님 혹은 종교를 우상으로 뒤바꿀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를 해치는 것이 항상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교종은 동방정교회의 지도자인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의 말을 빌려 이러한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자연 세계에 저지른 죄는 우리 자신과 하느님을 거슬러 저지른 죄”(8)입니다. 가능한 한 명확하게, 교종은 우리가 이러한 연결을 보길 원합니다. 바로 지구와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도 깨뜨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사랑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형식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교종은 다음 장에서 현대 세계의 죄에 대해 할 말이 더 많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교종은 우리에게 다음 문장을 상기시키기 위해 애씁니다. 바로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일하기를 바라시며 우리의 협력을 기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에서도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실 수 있습니다”(80). 왜냐하면, 맨 처음부터 하느님의 성령은 모든 것에 현존하셨고, “이 세계를 가능성으로 가득 채우시었기에…언제나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80). 감사하게도, “불의는 무적이 아닌 것”(74)이고 “희망을 되찾는 데에는 의로운 한 사람으로 충분합니다!”(71)
성경의 나머지는 하느님이 점점 이 부서진 관계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협력을 통해서 말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모든 일을 원활하게 하려고 우주적인 마법을 행한다면, 수 세기에 걸쳐 쓰인 많은 책 중에 한 권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훌륭한 부모와 같은 하느님은 심지어 떼쓰는 아이에게서도 가장 좋은 것을 끌어내려 애쓰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하실까요?
하느님이 사용하는 기초적인 도구는 사람들과 계약을 맺는 것, 그리고 사회를 다스리는 규칙들과 계약을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율법은 깨어진 관계를 복구하고, 불화가 아니라 조화 안에서 사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 선물이자 지식이어서 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구절이 시편에도 여러 번 반복됩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시는데 그것은 구원을 위한 시험이 아니라 (하느님은 율법을 주시기 이전에! 이미 그들을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들의 삶을 위한 규율이었습니다. 그 규율은 이스라엘 백성 공동의 삶이라는 빛나는 예시에 따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 이 땅의 모든 민족은 그의 자손들이 축복받았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율법을 십계명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완전히 생태적입니다. 교종은 율법이 “[하느님께서] 직접 자연에 새겨놓으신 순환의 재발견과 존중이 동반된다는 것”, “다른 이들과 맺은 관계와 그들이 살고 일하는 땅과 맺은 관계의 균형과 공정”을 보장해주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말합니다(71).
교종이 말하는 율법의 두 가지 생태적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한 강조입니다. 안식일은 휴식의 날로, 이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 받은 선물이라는 생각을 드높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막에서 이스라엘에 천상의 만나를 주셨을 때,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둬들일 수 없었고 이것은 하느님이 충분히 주실 거라는 신뢰의 표징이었습니다(탈출 16, 25-27). 심지어 땅도 안식의 해를 받았고, 교종은 이것이 최고의 생태적 실천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땅의 전적인 소유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고리대금 금지와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가족들에게 땅을 되돌려주는 것을 포함해서, 다양한 율법 조항을 통해 하느님은 더 큰 목표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소수의 사람에게 막대한 땅(부)의 축적이 돌아가는 걸 제한하는 것입니다. 대신에 땅은 분배되어야 하고, 소유권이 있다 하더라도 공유되어야 합니다. 다른 법들도 이런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구석진 땅의 곡식은 “가난한 이와 이방인”이 주울 수 있도록 수확하지 않은 채로 남겨두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19, 9-10).
율법의 구체적인 요구는 예수님을 통해 완성에 도달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지 않고 완성하십니다. 물질적 소유에 대한 법과 관련해, 가톨릭은 이를 “재화의 보편적 목적”(93)으로 압축해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지구의 모든 재화가 모든 이에게 자유로이 공유되도록 의도하셨고, 율법은 죄 많은 인간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독려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교적 전통은 이 권리[소유권, 재산권]를 절대적이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결코 고집하지 않았”고, 오히려 “창조된 모든 재화를 사용하는 것은 모든 이의 공동 권리라는 넓은 의미에서 항상 이해되어 왔다”고 설명합니다(요한 바오로 2세, 「노동하는 인간」, 14항). 프란치스코 교종은 재화의 보편적 목적을 “사회 활동의 ‘황금률”이자 “윤리적 사회적 질서 전체의 제1 원리”(93)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것이 예수님의 명령들 안에서 생생하게 묘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유롭게 가진 것을 나누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말씀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닮으려 했던 것임을 기억합시다.
그렇다면 이런 가르침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프란치스코 교종의 글에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첫째로, 우리는 소비주의 습관을 끊어내야 합니다. 우리가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고, 버리고 더 많이 사는 습관 말입니다. 이는 공유해야 할 것들을 낭비하면서, 우리 자신을 위해 물질적 풍요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습관을 포기할 수 있다면, 두 번째로 우리는 분배 정의에 대한 요청에 자유로이 응답할 수 있을 겁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오늘날의 세계 경제를 비판하면서, “힘이 정의”라는 관점이 “엄청난 불평등”을 초래한다고 지적합니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시하신 조화, 정의, 형제애, 평화의 이상”에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82). 분배 정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응당 받아야 하는 것, 그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단지 생존할만한 수준이 아니라 인간 자체로서의 풍족함에 관한 것입니다. 잘 살기 위해서 우리는 빵이나 물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함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휴식과 양질의 노동환경, 교육을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분배 정의가 모든 사람이 획일적인 평등함을 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몇몇 사람이 “충분함”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고, 세계에서 그보다 많은 사람이 정말 필요한 것보다 훨씬 적게 가지고 있는 불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세계 경제 구조는 모두를 위한 부의 순환을 지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제 구조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라는 원칙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종이 자주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는 탐욕을 우상화하는, 이미 부를 가진 사람이 극한의 부를 축적하게 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전의 한 회칙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도덕적 삶의 초상으로서 예수님을 만난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따르려면, 아니, 우리가 가진 전부를 주라는 예수님의 더 깊은 요구를 따르려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의 소유를 포기해야 할까요?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떠나갔다고 끝맺는데, 그는 포기할 준비가 덜 되었던 것입니다(마태 19, 22). 하느님, 이웃, 지구와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는 발전한 국가에 사는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줍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는 소유물을 포기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슬퍼하면서 떠나갈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종은 일상적 영성 안에서 우리가 희망을 품도록 북돋우며 예수님의 평화로운 시선에 관한 묵상으로 끝맺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목표는 종종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라는 열망을 통해 표현됩니다. 시편 저자는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강복하소서. 당신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소서(시편 67, 2)” 그리고 교종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을 직접 봤다는 걸 상기시켜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어려움이 있을 때 피하지 마십시오.

일상을 위한 질문들

1. 일상에서 우리는 창조의 아름다움이라는 선물의 가치를 잘 알아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자연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선물로 여길 수 있을까요? 우리가 알게 된 아름다움에 대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려 노력해봅시다.

2. “재화의 보편적 목적”을 지향하기 위하여, 소유와 재산을 사용하는 나의 관점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이웃들과 더 많이 나눌 방법을 찾아봅시다.

3. 주변을 돌아봤을 때, 모든 피조물이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작은 것이라도 내가 피조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내 행동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기도하기
(요한 14,6-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날 준비를 하실 때, 필립보는 예수님께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하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을 통하여 하느님을 봅니까? 그분이 우리 삶을 바라볼 때 우리가 그분의 얼굴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 지에 관하여 묵상합시다. 고통받는 피조물들과 가난한 이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을 알도록 도와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드립시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