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땅물벗 서강

181001 하늘땅물벗 2주년 서강벗소개

제3장. 생태적 위기에 대한 인간의 근원들

작성자
태희 홍
작성일
2018-10-09 17:03
조회
78
제3장. 생태적 위기에 대한 인간의 근원들

회칙 요약

[101] 단순히 생태 위기의 증상들만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생태적 위기를 초래한 인간에 의한 근원들 또한 검토해 보아야합니다.

I. 기술: 창의력과 힘
[102] 우리는 두 세기에 걸쳐 교통수단, 통신, 에너지, 의학, 그리고 정보 분야 등에서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보아왔습니다. 기술은 번창하고 급격한 속도로 발전하였으며 발전으로 인해 기뻐하고 그 가능성에 흥분하였습니다. 이러한 진전들을 통해, 사람들의 삶은 더욱 편리해지게 되었고, 수많은 질병들이 치료가능하게 되었으니 어찌 그러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업적을 인정하고 고맙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03] 기술과학이 방향을 제대로 잡는다면, 인간을 아름다운 세계로 도약하게 할 수 있습니다. [104] 하지만 이러한 기술들은 동시에 인간 삶을 파괴하는데 쓰여 질 수도 있습니다. 인류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항상 좋은 곳에만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105] 사람들은 기술과 힘에 있어서 모든 진보가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책임과 가치관, 양심의 발전이 함께 있을 때에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할 위험이 커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완전히 자율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는 무의식, 즉각적인 욕구, 이기주의 혹은 폭력의 맹목적인 힘 앞에서 무너질 때 병들게 됩니다.

II.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의 세계화
[106] 우리가 ‘지구 자원을 무한히 이용하여 쓸 수 있다’는 사고는 거짓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지구의 한계를 넘어서 최대한 ‘쥐어짜내게’ 합니다. 이러한 가정이 바로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입니다. [107] 만약 기술이 인간 공동체의 가치를 결정하게 둔다면 인간의 가치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기술의 산물은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특정 권력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회의 기회들을 통제합니다. [108] 오늘날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의 지배가 매우 강력해져서 이를 수단으로 삼지 않고 사는 것이 어려워졌고, 그 논리에 지배되지 않으면서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기술은 궁극적으로 유용성이나 복지가 아니라 권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109] 기술은 항상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발전을 위해서 자연환경을 소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인간 개인의 결단력을 포기하게 만드는 이러한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은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고자 합니다. 경제는 기술로부터 이윤의 가능성만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술이 모든 환경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전 세계 기아와 빈곤이 단순히 시장의 성장만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시장 자체가 온전한 인간 발전과 사회 통합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한편에서는 낭비적이고 소비 중심적인 일종의 ‘초발전’을 이루지만, 가난한 이들의 생필품 마련을 위한 경제적 지원 시설과 사회 제도의 개발은 더딥니다. 이러한 불균형은 기술과 경제 성장의 방향, 목적, 의미, 사회적 맥락과 관련됩니다.
[110] 기술은 매우 전문적인 분야이고 ‘세분화’ 되어 있어서 구체적 적용에는 도움이 되지만 ‘전체적인 시각’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으로는 오늘날 세계의 가장 복잡한 문제들, 특히 환경과 가난한 이들의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을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고, 환경은 착취당하며, 일상생활에서 공동체의 의미는 상실되어가고 있습니다.
[111] 우리는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의 권위에 대항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112] 그리고 기술을 제한하고 그 방향을 바꾸도록 함께 노력해야합니다. 오염을 줄이는 방법을 택하고 소비 지상주의를 지양하는 삶과 여유와 공동생활 방식을 택하는 것은 이러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깊은 곳에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이나 이기심이 아닌 진정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갈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113] 사람들은 더 이상 현재의 세계정세와 기술력을 근거로 하는 ‘더 나은 미래’를 맹목적으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기술은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훌륭하고 멋진 가능성들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더 깊은 의미와 목적을 찾아가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방향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114] 우리에게는 ‘용감한 문화적 혁명’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구석기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진정으로 인간에게 이로운 것을 찾아가도록 기술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속도를 줄이고,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보며, 긍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받아들이는 것과 더불어, 지나친 과대망상으로 잃어버린 가치와 중요한 목표들을 되찾는 것입니다.

성찰하기
106-108항에 대한 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술의 노예가 되었다고 봅니까?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자신의 말로 표현해 봅시다.

III. 현대 인간 중심주의의 위기와 영향
[115] 인간을 식물이나 동물 혹은 다른 창조물보다 더 가치 있고 중심이 되는 존재라고 여기는 관점이 ‘인간 중심주의’입니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자연을 단순히 이익을 취하는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도구나 물건처럼 인식하게 됩니다. [116] 지나친 인간 중심주의의 또 다른 관점은 식물, 동물, 바다, 공기, 지구를 자원으로서의 가치에 상관없이 인간들을 위해 사용하고 고갈시켜도 된다고 믿는 견해에 영향을 줍니다. [117] 모든 것들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 인간 배아, 장애인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지 못할 때 자연의 울부짖음도 들을 수 없습니다. 창조물을 “가꾸고 보존하는 것” 대신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리에 우리 자신을 올려놓으며, 이렇게 자연의 반항을 자극하게 됩니다.
[118] 만약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따른다면, 인류는 기술보다도 못한 존재로 여겨질 것입니다. [119]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생태 위기는 더 큰 영적 위기에 대한 하나의 작은 징조에 불과합니다. 모든 근본적인 인간관계들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자연 환경과 맺은 관계의 치유를 요청할 수 없습니다. 인간과 환경의 관계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120]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기에, 작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인간 배아를 보호하지 않고서는, 환경 안에 있는 모든 창조물들에 대한 보호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121] 이제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돌아보며 그릇된 변증법을 극복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합니다.

성찰하기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혹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우주의 중심입니까?
117항에 대한 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나 공동체에서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실용적 상대주의
[122] 지나친 인간중심주의는 인간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며 모든 것을 상대화시킵니다. 어떤 물건을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나오는지 상관없이 모든 제품들, 심지어 식물과 동물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유익에 따라 상대적으로 가치를 매깁니다. [123] 또한 사람들까지도 이용 가능한 대상으로 여기며 부당하게 그들을 이용합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 충족만을 추구하며, 우리를 지켜줄 다른 객관적 진리나 윤리 원칙을 찾지 않는다면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쓰고 버리는’ 문화 안에서 살면서 인간들마저도 쉽게 쓰고 버리게 됩니다.

고용 보호의 필요성
[124] 인간 노동은 소중하게 세상을 돌보는 데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집니다. [125] 일은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신성한 활동입니다. [126] 베네딕도 성인은 인간 노동이 영적인 의미를 가짐을 찾게 해주었습니다. [127] 노동은 생계를 도모하고, 가치를 실현하고, 재능을 계발하는 등 개인의 다양한 성장을 위한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128] 가난한 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이가 노동을 통해 존엄한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언제나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합니다. 단지 경제적 이익을 위해 노동자를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가치들이 조합될 때 그 일은 성공할 것입니다. [129] 기업 활동은 고귀한 소명입니다. 그것은 소규모이며 지역에서 식품이나 상품을 생산하는 영세업자들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합니다. 많은 경우 지역 시장과 세계시장의 접근이 어렵고 판매와 운송의 기반 시설이 대기업에 유리하게 되어 있기에 행정 당국은 군소 생산 업자들을 지원해야합니다.

새로운 생명 공학
[130] 생물학적 방법이나 의학, 동물에 대한 실험들이 이루어질 때는 항상 ‘합당한 한계들’ 안에서 이루어져야합니다. [131] 우리는 그러한 작업에 따르는 윤리적 한계들을 고려하며 이루어지는 분자 생물학과 유전학의 발전을 지지합니다. [132] 인간이 동?식물계에 개입하는 것에 관한 모든 부분에서 성찰이 이루어져야합니다. 모든 유전자 조작은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창조물의 본질에 따라 자연이 발전하게 하는데 그 목적을 두어야합니다. [133] 사실 동물 길들이기와 교잡 육종 등을 통해 유전자 변형은 자연에서도 자주 발생되어 왔고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자연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천천히 진행되지만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변형은 현저히 그 속도가 빠릅니다. [134] 유전자 변형 농산물이 일부 지역에서는 경제 성장을 가져와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만, 많은 지역에서는 이러한 곡물의 도입으로 비옥한 농토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 농지를 빌려 쓰게 되었습니다. [135]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광범위하고 책임 있는 과학적, 사회적 토론이 이루어져야합니다. [136]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인간 배아 실험을 제한하고 보호해야합니다. 한 인간의 가치는 배아 배양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기술이나 과학으로부터 윤리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성찰하기
교종은 ‘기업 활동은 고귀한 소명이며 일자리를 지키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경제 성장과 함께 환경을 보존하기 위한 방안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122-123항에 대한 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매주 나는 얼마나 많은 물건들을 ‘쓰고 버립니까’? 지난 한 주를 돌아보고 함께 나누어봅시다.

회칙 해설

‘공정하게 판결하는 이들은 잘 지낼 것이다. (잠언 24,25)’

우리는 매우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절만 하더라도 우리 주변의 재료들은 대부분 우리 ‘주변’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많은 물건들이 그 지역이나 집에서 직접 만들어진 상품이었고, 그 지역 안에서 고쳐지고 수리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합니까? 전화기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전화기는 많은 나라에서 온 부품들로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하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어떻게 원하는 곳으로 전달되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우리 집 근처에 송신탑이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모를 수 있습니다. 전화기를 충전하기 위한 전기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도 모릅니다. 충전을 위해 우리 집으로 오는 전기 시스템에 관해 조금은 알 수 있겠지만 전기 시스템이 문제가 없다고 보증한 건물 감리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분명 전선을 판매한 회사의 직원들을 잘 알지 못할 것이며, 그것을 조립한 사람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전화기가 작동되는 전반적인 상황만을 알 뿐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나머지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상상해 본다면... 세상은 정말 놀랍도록 복잡합니다.
특별히 모든 것이 서로 얽혀있는 자연 환경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과연 우리가 어떻게 자연이 “작동하는 방법”을 다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것이 잘 작동하거나 그렇지 못한 것의 배경에는 인간이 “가꾸고 보존하는 것”이 관여되어 있을까요? 바로 이것이 이 장에서 교종이 고심하고 있는 질문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가장 어려운 질문일 지도 모릅니다. 교종은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라고 강조합니다. 자연에서나 성경에서 서로 연결된 것은 사회·문화·경제의 관계보다 단순합니다. 인간 세계는 훨씬 더 복잡합니다. 이 장에서 교종은 자연과의 잘못된 관계의 뿌리로 왜곡된 인간관계를 지목하며 그것을 ‘위기’로 분명히 밝히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을 위해 먼저, 우리가 한 걸음 물러서 볼 것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 안에서 살고 있고, 이미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생각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대부분 우리 삶의 바탕에서 살아 움직이며 우리가 무엇을 보고,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줍니다. 즉, 우리는 세상의 여러 역학 관계에 대해 ‘판단’을 갖게 됩니다. 운전을 예로 든다면 보통 우리는 운전하는 방법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으며 그들은 왜 저런 식으로 운전하는지에 대하여 각자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견해는 우리의 판단에 대한 배경으로 작용하면서 운전하는 방법에 영향을 줍니다.
요컨대, 우리는 당면한 것에 대해 나름의 인식을 갖게 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그 세계관에 뿌리를 둡니다. 그것은 대개 중대한 결정에 큰 영향력을 지닙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우리가 지닌 세계관에 질문을 던질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 각자도 최신 영화나 스포츠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지만, 서로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더 깊이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회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여겨진다면 우리는 먼저 ‘세계관’을 면밀히 살펴보아야합니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을 강력히 반대했던 마틴 루터킹이나 다른 이들의 영웅적 행위 덕분에, 우리 대부분은 모든 이들이 평등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세계관을 더욱 강하게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어떤 사람이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다고 주장하면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며 그를 보호해야합니다.
회칙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인간 사회는 우리 공동의 집을 파괴하고 있는가?” 그 누구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파괴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교종은 공동의 집이 파괴되는 문제의 근원으로 현대 사회의 작동 원리인 기술관료적 패러다임과 현대적 인간중심주의를 꼽고 있습니다. 용어가 어렵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우리가 변화시켜야 하는 지배적인 세계관, 즉 현재 우리가 일상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모습입니다. 교종은 그 대안으로 다음 장에서 설명할 ‘통합 생태론’에 기초한 세계관을 제안합니다.
그렇다면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이란 무엇일까요? 106-107항을 봅시다. 교종은 자연을 다루는 두 가지 방식 사이에 복잡한 차이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좋은 방식은 ‘자연 자체가 허용하는 것을 수용하는 것’으로서, ‘사물 그 자신 스스로의 성질을 존중하며 더불어 조화롭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창조 질서 안에 내재된 한계를 존중합니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해 자연에 개입하지만, 한계를 받아들이며 한계 내에서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나쁜 방식은 ‘우리 눈앞의 실재를 망각하거나 무시하면서, 그들로부터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착취하려고 시도하면서 사물을 조작하는 것’ 입니다. 지구에서 무한한 양의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고 쓰레기를 무한히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구는 ‘쥐어 짜여’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한계를 무시하면서, 심지어 그러한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깁니다.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은 인간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무형의 실체’로서의 자연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위치로 올려놓았습니다. 기술관료제는 ‘기술에 의해 지배받는’것을 의미 합니다. 기술관료제는 우리가 자연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요 출처(3장)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 신부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가톨릭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주제, 특히 살아있는 ‘신비체로서의 교회’와 가톨릭 생활의 모든 곳에 생기를 불어넣는 ‘전례’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처럼, 그는 살아있는 신앙의 진정한 핵심을 잃어버린 채 외형과 조직을 강조하는 가톨릭 신자에 대해 걱정했습니다. 또한 그는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비판했습니다. 세상은 기술을 과용해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내적, 영적인 삶을 잠재적으로 파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찬미받으소서’에서 과르디니의 책 ‘근대의 종말’을 여러 번 인용합니다. 환경과 기술에 대한 그의 생각을 쉽게 소개하는 또 다른 에세이로 북이탈리아의 마운틴 레이크의 변화를 목격한 후 쓴 ‘코모 호수로부터 온 편지’가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패러다임이 단순히 유전자 조작, 심해 석유 시추, 그리고 산을 밀어버리는 채굴 등과 같은 환경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사회’에도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기술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사회를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조정됩니다. 우리 삶의 한계는 인간 본성보다는 기술에 의해 규정된 가능성들에 의해 정해집니다. 이것들은 결국 생활양식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종은 우리가 모든 기술을 없애기를 원하실까요?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두 가지에 대하여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첫째, 기술은 인간이 힘을 갖게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 힘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지혜를 함께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 힘은 오히려 인간을 위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힘을 더 가질수록 우리는 그것을 더 지혜롭게 사용해야합니다. 우리는 왜 기술을 발전시켜야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었으며, 기술에 의해 무작정 끌려가기 때문에 현명한 사용 또한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기술이 인간을 위한 수단이 되도록 한 것이 아니라, 수단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내버려 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삶을 돕도록 개발된 기술이 오히려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앞서의 구절에서, 교종은 우리가 지닌 ‘정신적 오염’(47)의 한 종류로서 ‘과부하’와 ‘혼란’을 언급하였습니다. 특히 스마트폰의 출현과 함께 우리 대부분은 이것들과 직접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디지털 세대인 청소년들의 두뇌에 관한 연구자들은 휴대폰이 항상 인간 주변에 있을 때 뇌는 그것에 적응하여 맞추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휴대폰은 이제 도구가 아니라 거꾸로 우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의 기능은 강력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에 주목하기보다 왜 우리가 이런 것들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하는 지혜도 함께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혜는 제쳐 놓고 더 강력한 기능만을 찾고 있습니다.
교종의 두 번째 경고는 이러한 도구들이 무제한적인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허상 안에서 인간관계를 다시 만들며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기술적 모상 안에서의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과 너무나 떨어져 있습니다. 저명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공장에 대량생산 기술이 등장하였을 때 이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공장에 있는 노동자들이 분업화를 통해서 보다 많은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과 함께, 그러한 지루한 작업이 노동자들을 최대한 바보 같고 무지하게 만든다는 것을 인지하였습니다. 스마트 자동차가 더 나은 운전자를 만들까요? 전자레인지가 더 나은 요리사를 만들까요? 인터넷 상의 관계가 더 나은 인간관계를 만들까요? 교종은 이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그는 내가 원하는 대로 취하거나 혹은 버릴 수 있는 관계적 특성을 지닌 온라인 기술을 비판합니다. 결국 이러한 것은 점점 더 지구의 자원들을 착취하도록 만듭니다.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은 교종께서 ‘현대 인간중심주의’라고 부른 두 번째 형태와 병행되었을 때 더욱 파괴적이게 됩니다.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것을 이르는 용어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진 고유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종이 비판하는 것은 ‘현대’입니다. 현대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을 자연 질서 안에서의 고유한 존재라는 위치에 두지 않습니다. 그보다, 자연 질서의 감각으로부터 인간을 완전히 분리시킵니다.
현대 인간중심주의는 ‘자기 모순적’이며 심지어 정신 분열을 일으키게 합니다. 다른 존재들의 고유한 가치를 부인하는 기술 관료주의를 찬양하는 것부터 인간의 그 어떠한 특별한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 반응까지 있습니다(118). 이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방식으로 인간을 가꾸고 보존하면서 자연의 한계 안에서 인간 능력을 합당하게 사용하지 않게 합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제 자리를 되찾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모순된 행동을 하고 맙니다.”(115)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인간이 현실에서 독립된 존재임을 선언하고 절대적 지배자임를 자처한다면, 인간 삶의 기초 자체가 붕괴된다”(117)는 것입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 교종 뿐 아니라 다른 이전의 교종들에게서도 중요하게 지적되었던 생각이었습니다. 현대 인간 중심주의는 자유에 대해 왜곡되고 과장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유는 여러모로 좋은 것이지만 지나치게 확장되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은 자유가 진리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말하였으며, 프란치스코 교종은 인간이 자유를 현실의 감각으로부터 분리시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상의 세계에 사는 것이 마치 자유를 느끼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현대 인간중심주의는 ‘실용적 상대주의’(122)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이것은 우리 일상에서 ‘그릇된 생활양식’(122)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세계관을 심사숙고하면서 일상을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계관이 우리의 삶 안에 들어와 일상으로 굳어가는 것입니다. 교종은 실용적 상대주의를 “즉각적인 이득을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의미 없다고 여기는 것”(122)으로 정의하며,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지구 자원은 무엇이던지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뿐 아니라, 어린이나 노인 무시, 인신매매, 성 착취, 마약 매매, 인간 배아 조작을 하도록 주장하는 이들의 내적 원리로 작용하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깔려있는 주된 생각은 “객관적 진리나 확고한 원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123)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예로 교종은 1장에서와 같이 노동과 생명 공학을 들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과 실용적 상대주의를 멈추게 하기 위해 어딘가에 시작선을 그어야 한다면, 이 영역에서 시작해야합니다.
환경을 위해 일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미국 작가 웬델 베리는 우리가 지구 및 환경과 올바른 관계로 연결되는 진정한 곳은, 한 주간 동안 환경 파괴에 기여하고 주말에 아름다운 주립공원에 가는 것이 아니라, 좋은 노동과 자원의 원천에 대한 존경, 그것이 만들어진 장소, 그것을 만드는 일 그리고 만들어진 것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은 그의 첫 번째 사회 회칙 「노동하는 인간」에서 가치 있는 노동을 좋은 사회를 만드는 중심점으로 잡았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동이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은 현대 인간중심주의에서 말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노동은 더욱 충만한 인간, 더욱 충만한 하느님의 모상이 되기 위한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또한 그것은 인간 존엄성의 가장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좋은 노동은 ‘인간화하는 노동’이지 ‘인간성을 뺏는 노동’이 아닙니다. 우리의 직업이 진정으로 인간적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노동이 인간들을 위한 “좋은 노동”으로 되기 위하여 우리의 산업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좋은 노동은 편한 노동, 직접적인 이윤을 내는 노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주요 문제는 생명 공학에 관한 것입니다. 교종은 식량 생산을 증가시키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로 격렬한 토론의 중심에 있는 GMO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한쪽 편을 들지 않으며, 서로 다른 개별적 상황에서는 일반적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종은 광범위하고 책임 있는 과학적 사회적 토론과 진정한 투명성을 요구합니다. 그는 인간 배아에 대한 유전학적 연구에도 분명한 선을 그어야한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노동과 생명공학 분야에서 성과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앞서 비판한 두 세계관을 염두에 두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발전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를 왜곡된 길로 이끄는 세계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한계’를 존중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자연 속에 주어진 것과 함께 작업하고, 그 모든 것이 선물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를 피상적으로 만족시키는 것들이 세상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일상을 위한 질문들
1. 나의 삶의 영역 중 기술이 지배하는 곳은 어느 부분입니까? 기술이 진정한 인간 발전과 영적 발전에 기여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관리하고 제한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2. 나는 기술을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제하기 위해서 사용합니까? 혹은 다른 창조물들과 관계를 지배하기 위해서입니까? 우리 모두는 다른 무언가를 통제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 교종이 비판하고 있는 나쁜 부류의 통제로 바뀐다고 생각합니까?

3. 나는 어느 때에 -다른 사람들, 지구,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 내 눈 앞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현대 인간중심주의’에 빠져듭니까? 나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단절시키는 이러한 욕구들로부터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기도
하느님은 구약의 인물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너는 땅이 얼마나 넓은지 이해할 수 있느냐?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 (욥 38, 4; 18)
- 하느님이 알고 계시고 하실 수 있는 것들, 하지만 인간은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모든 것들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창조물의 다양성과 복잡함을 존중하기 위해 겸손의 은총을 하느님께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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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01 하늘땅물벗 2주년 서강벗소개

제3장. 생태적 위기에 대한 인간의 근원들

작성자
태희 홍
작성일
2018-10-09 17:03
조회
78
제3장. 생태적 위기에 대한 인간의 근원들

회칙 요약

[101] 단순히 생태 위기의 증상들만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생태적 위기를 초래한 인간에 의한 근원들 또한 검토해 보아야합니다.

I. 기술: 창의력과 힘
[102] 우리는 두 세기에 걸쳐 교통수단, 통신, 에너지, 의학, 그리고 정보 분야 등에서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보아왔습니다. 기술은 번창하고 급격한 속도로 발전하였으며 발전으로 인해 기뻐하고 그 가능성에 흥분하였습니다. 이러한 진전들을 통해, 사람들의 삶은 더욱 편리해지게 되었고, 수많은 질병들이 치료가능하게 되었으니 어찌 그러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업적을 인정하고 고맙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03] 기술과학이 방향을 제대로 잡는다면, 인간을 아름다운 세계로 도약하게 할 수 있습니다. [104] 하지만 이러한 기술들은 동시에 인간 삶을 파괴하는데 쓰여 질 수도 있습니다. 인류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항상 좋은 곳에만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105] 사람들은 기술과 힘에 있어서 모든 진보가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책임과 가치관, 양심의 발전이 함께 있을 때에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할 위험이 커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완전히 자율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는 무의식, 즉각적인 욕구, 이기주의 혹은 폭력의 맹목적인 힘 앞에서 무너질 때 병들게 됩니다.

II.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의 세계화
[106] 우리가 ‘지구 자원을 무한히 이용하여 쓸 수 있다’는 사고는 거짓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지구의 한계를 넘어서 최대한 ‘쥐어짜내게’ 합니다. 이러한 가정이 바로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입니다. [107] 만약 기술이 인간 공동체의 가치를 결정하게 둔다면 인간의 가치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기술의 산물은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특정 권력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회의 기회들을 통제합니다. [108] 오늘날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의 지배가 매우 강력해져서 이를 수단으로 삼지 않고 사는 것이 어려워졌고, 그 논리에 지배되지 않으면서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기술은 궁극적으로 유용성이나 복지가 아니라 권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109] 기술은 항상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발전을 위해서 자연환경을 소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인간 개인의 결단력을 포기하게 만드는 이러한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은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고자 합니다. 경제는 기술로부터 이윤의 가능성만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술이 모든 환경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전 세계 기아와 빈곤이 단순히 시장의 성장만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시장 자체가 온전한 인간 발전과 사회 통합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한편에서는 낭비적이고 소비 중심적인 일종의 ‘초발전’을 이루지만, 가난한 이들의 생필품 마련을 위한 경제적 지원 시설과 사회 제도의 개발은 더딥니다. 이러한 불균형은 기술과 경제 성장의 방향, 목적, 의미, 사회적 맥락과 관련됩니다.
[110] 기술은 매우 전문적인 분야이고 ‘세분화’ 되어 있어서 구체적 적용에는 도움이 되지만 ‘전체적인 시각’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으로는 오늘날 세계의 가장 복잡한 문제들, 특히 환경과 가난한 이들의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을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고, 환경은 착취당하며, 일상생활에서 공동체의 의미는 상실되어가고 있습니다.
[111] 우리는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의 권위에 대항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112] 그리고 기술을 제한하고 그 방향을 바꾸도록 함께 노력해야합니다. 오염을 줄이는 방법을 택하고 소비 지상주의를 지양하는 삶과 여유와 공동생활 방식을 택하는 것은 이러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깊은 곳에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이나 이기심이 아닌 진정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갈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113] 사람들은 더 이상 현재의 세계정세와 기술력을 근거로 하는 ‘더 나은 미래’를 맹목적으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기술은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훌륭하고 멋진 가능성들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더 깊은 의미와 목적을 찾아가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방향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114] 우리에게는 ‘용감한 문화적 혁명’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구석기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진정으로 인간에게 이로운 것을 찾아가도록 기술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속도를 줄이고,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보며, 긍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받아들이는 것과 더불어, 지나친 과대망상으로 잃어버린 가치와 중요한 목표들을 되찾는 것입니다.

성찰하기
106-108항에 대한 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술의 노예가 되었다고 봅니까?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자신의 말로 표현해 봅시다.

III. 현대 인간 중심주의의 위기와 영향
[115] 인간을 식물이나 동물 혹은 다른 창조물보다 더 가치 있고 중심이 되는 존재라고 여기는 관점이 ‘인간 중심주의’입니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자연을 단순히 이익을 취하는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도구나 물건처럼 인식하게 됩니다. [116] 지나친 인간 중심주의의 또 다른 관점은 식물, 동물, 바다, 공기, 지구를 자원으로서의 가치에 상관없이 인간들을 위해 사용하고 고갈시켜도 된다고 믿는 견해에 영향을 줍니다. [117] 모든 것들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 인간 배아, 장애인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지 못할 때 자연의 울부짖음도 들을 수 없습니다. 창조물을 “가꾸고 보존하는 것” 대신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리에 우리 자신을 올려놓으며, 이렇게 자연의 반항을 자극하게 됩니다.
[118] 만약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따른다면, 인류는 기술보다도 못한 존재로 여겨질 것입니다. [119]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생태 위기는 더 큰 영적 위기에 대한 하나의 작은 징조에 불과합니다. 모든 근본적인 인간관계들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자연 환경과 맺은 관계의 치유를 요청할 수 없습니다. 인간과 환경의 관계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120]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기에, 작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인간 배아를 보호하지 않고서는, 환경 안에 있는 모든 창조물들에 대한 보호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121] 이제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돌아보며 그릇된 변증법을 극복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합니다.

성찰하기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혹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우주의 중심입니까?
117항에 대한 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나 공동체에서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실용적 상대주의
[122] 지나친 인간중심주의는 인간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며 모든 것을 상대화시킵니다. 어떤 물건을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나오는지 상관없이 모든 제품들, 심지어 식물과 동물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유익에 따라 상대적으로 가치를 매깁니다. [123] 또한 사람들까지도 이용 가능한 대상으로 여기며 부당하게 그들을 이용합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 충족만을 추구하며, 우리를 지켜줄 다른 객관적 진리나 윤리 원칙을 찾지 않는다면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쓰고 버리는’ 문화 안에서 살면서 인간들마저도 쉽게 쓰고 버리게 됩니다.

고용 보호의 필요성
[124] 인간 노동은 소중하게 세상을 돌보는 데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집니다. [125] 일은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신성한 활동입니다. [126] 베네딕도 성인은 인간 노동이 영적인 의미를 가짐을 찾게 해주었습니다. [127] 노동은 생계를 도모하고, 가치를 실현하고, 재능을 계발하는 등 개인의 다양한 성장을 위한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128] 가난한 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이가 노동을 통해 존엄한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언제나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합니다. 단지 경제적 이익을 위해 노동자를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가치들이 조합될 때 그 일은 성공할 것입니다. [129] 기업 활동은 고귀한 소명입니다. 그것은 소규모이며 지역에서 식품이나 상품을 생산하는 영세업자들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합니다. 많은 경우 지역 시장과 세계시장의 접근이 어렵고 판매와 운송의 기반 시설이 대기업에 유리하게 되어 있기에 행정 당국은 군소 생산 업자들을 지원해야합니다.

새로운 생명 공학
[130] 생물학적 방법이나 의학, 동물에 대한 실험들이 이루어질 때는 항상 ‘합당한 한계들’ 안에서 이루어져야합니다. [131] 우리는 그러한 작업에 따르는 윤리적 한계들을 고려하며 이루어지는 분자 생물학과 유전학의 발전을 지지합니다. [132] 인간이 동?식물계에 개입하는 것에 관한 모든 부분에서 성찰이 이루어져야합니다. 모든 유전자 조작은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창조물의 본질에 따라 자연이 발전하게 하는데 그 목적을 두어야합니다. [133] 사실 동물 길들이기와 교잡 육종 등을 통해 유전자 변형은 자연에서도 자주 발생되어 왔고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자연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천천히 진행되지만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변형은 현저히 그 속도가 빠릅니다. [134] 유전자 변형 농산물이 일부 지역에서는 경제 성장을 가져와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만, 많은 지역에서는 이러한 곡물의 도입으로 비옥한 농토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 농지를 빌려 쓰게 되었습니다. [135]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광범위하고 책임 있는 과학적, 사회적 토론이 이루어져야합니다. [136]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인간 배아 실험을 제한하고 보호해야합니다. 한 인간의 가치는 배아 배양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기술이나 과학으로부터 윤리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성찰하기
교종은 ‘기업 활동은 고귀한 소명이며 일자리를 지키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경제 성장과 함께 환경을 보존하기 위한 방안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122-123항에 대한 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매주 나는 얼마나 많은 물건들을 ‘쓰고 버립니까’? 지난 한 주를 돌아보고 함께 나누어봅시다.

회칙 해설

‘공정하게 판결하는 이들은 잘 지낼 것이다. (잠언 24,25)’

우리는 매우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절만 하더라도 우리 주변의 재료들은 대부분 우리 ‘주변’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많은 물건들이 그 지역이나 집에서 직접 만들어진 상품이었고, 그 지역 안에서 고쳐지고 수리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합니까? 전화기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전화기는 많은 나라에서 온 부품들로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하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어떻게 원하는 곳으로 전달되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우리 집 근처에 송신탑이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모를 수 있습니다. 전화기를 충전하기 위한 전기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도 모릅니다. 충전을 위해 우리 집으로 오는 전기 시스템에 관해 조금은 알 수 있겠지만 전기 시스템이 문제가 없다고 보증한 건물 감리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분명 전선을 판매한 회사의 직원들을 잘 알지 못할 것이며, 그것을 조립한 사람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전화기가 작동되는 전반적인 상황만을 알 뿐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나머지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상상해 본다면... 세상은 정말 놀랍도록 복잡합니다.
특별히 모든 것이 서로 얽혀있는 자연 환경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과연 우리가 어떻게 자연이 “작동하는 방법”을 다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것이 잘 작동하거나 그렇지 못한 것의 배경에는 인간이 “가꾸고 보존하는 것”이 관여되어 있을까요? 바로 이것이 이 장에서 교종이 고심하고 있는 질문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가장 어려운 질문일 지도 모릅니다. 교종은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라고 강조합니다. 자연에서나 성경에서 서로 연결된 것은 사회·문화·경제의 관계보다 단순합니다. 인간 세계는 훨씬 더 복잡합니다. 이 장에서 교종은 자연과의 잘못된 관계의 뿌리로 왜곡된 인간관계를 지목하며 그것을 ‘위기’로 분명히 밝히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을 위해 먼저, 우리가 한 걸음 물러서 볼 것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 안에서 살고 있고, 이미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생각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대부분 우리 삶의 바탕에서 살아 움직이며 우리가 무엇을 보고,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줍니다. 즉, 우리는 세상의 여러 역학 관계에 대해 ‘판단’을 갖게 됩니다. 운전을 예로 든다면 보통 우리는 운전하는 방법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으며 그들은 왜 저런 식으로 운전하는지에 대하여 각자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견해는 우리의 판단에 대한 배경으로 작용하면서 운전하는 방법에 영향을 줍니다.
요컨대, 우리는 당면한 것에 대해 나름의 인식을 갖게 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그 세계관에 뿌리를 둡니다. 그것은 대개 중대한 결정에 큰 영향력을 지닙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우리가 지닌 세계관에 질문을 던질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 각자도 최신 영화나 스포츠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지만, 서로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더 깊이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회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여겨진다면 우리는 먼저 ‘세계관’을 면밀히 살펴보아야합니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을 강력히 반대했던 마틴 루터킹이나 다른 이들의 영웅적 행위 덕분에, 우리 대부분은 모든 이들이 평등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세계관을 더욱 강하게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어떤 사람이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다고 주장하면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며 그를 보호해야합니다.
회칙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인간 사회는 우리 공동의 집을 파괴하고 있는가?” 그 누구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파괴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교종은 공동의 집이 파괴되는 문제의 근원으로 현대 사회의 작동 원리인 기술관료적 패러다임과 현대적 인간중심주의를 꼽고 있습니다. 용어가 어렵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우리가 변화시켜야 하는 지배적인 세계관, 즉 현재 우리가 일상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모습입니다. 교종은 그 대안으로 다음 장에서 설명할 ‘통합 생태론’에 기초한 세계관을 제안합니다.
그렇다면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이란 무엇일까요? 106-107항을 봅시다. 교종은 자연을 다루는 두 가지 방식 사이에 복잡한 차이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좋은 방식은 ‘자연 자체가 허용하는 것을 수용하는 것’으로서, ‘사물 그 자신 스스로의 성질을 존중하며 더불어 조화롭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창조 질서 안에 내재된 한계를 존중합니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해 자연에 개입하지만, 한계를 받아들이며 한계 내에서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나쁜 방식은 ‘우리 눈앞의 실재를 망각하거나 무시하면서, 그들로부터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착취하려고 시도하면서 사물을 조작하는 것’ 입니다. 지구에서 무한한 양의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고 쓰레기를 무한히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구는 ‘쥐어 짜여’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한계를 무시하면서, 심지어 그러한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깁니다.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은 인간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무형의 실체’로서의 자연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위치로 올려놓았습니다. 기술관료제는 ‘기술에 의해 지배받는’것을 의미 합니다. 기술관료제는 우리가 자연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요 출처(3장)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 신부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가톨릭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주제, 특히 살아있는 ‘신비체로서의 교회’와 가톨릭 생활의 모든 곳에 생기를 불어넣는 ‘전례’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처럼, 그는 살아있는 신앙의 진정한 핵심을 잃어버린 채 외형과 조직을 강조하는 가톨릭 신자에 대해 걱정했습니다. 또한 그는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비판했습니다. 세상은 기술을 과용해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내적, 영적인 삶을 잠재적으로 파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찬미받으소서’에서 과르디니의 책 ‘근대의 종말’을 여러 번 인용합니다. 환경과 기술에 대한 그의 생각을 쉽게 소개하는 또 다른 에세이로 북이탈리아의 마운틴 레이크의 변화를 목격한 후 쓴 ‘코모 호수로부터 온 편지’가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패러다임이 단순히 유전자 조작, 심해 석유 시추, 그리고 산을 밀어버리는 채굴 등과 같은 환경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사회’에도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기술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사회를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조정됩니다. 우리 삶의 한계는 인간 본성보다는 기술에 의해 규정된 가능성들에 의해 정해집니다. 이것들은 결국 생활양식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종은 우리가 모든 기술을 없애기를 원하실까요?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두 가지에 대하여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첫째, 기술은 인간이 힘을 갖게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 힘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지혜를 함께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 힘은 오히려 인간을 위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힘을 더 가질수록 우리는 그것을 더 지혜롭게 사용해야합니다. 우리는 왜 기술을 발전시켜야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었으며, 기술에 의해 무작정 끌려가기 때문에 현명한 사용 또한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기술이 인간을 위한 수단이 되도록 한 것이 아니라, 수단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내버려 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삶을 돕도록 개발된 기술이 오히려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앞서의 구절에서, 교종은 우리가 지닌 ‘정신적 오염’(47)의 한 종류로서 ‘과부하’와 ‘혼란’을 언급하였습니다. 특히 스마트폰의 출현과 함께 우리 대부분은 이것들과 직접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디지털 세대인 청소년들의 두뇌에 관한 연구자들은 휴대폰이 항상 인간 주변에 있을 때 뇌는 그것에 적응하여 맞추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휴대폰은 이제 도구가 아니라 거꾸로 우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의 기능은 강력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에 주목하기보다 왜 우리가 이런 것들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하는 지혜도 함께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혜는 제쳐 놓고 더 강력한 기능만을 찾고 있습니다.
교종의 두 번째 경고는 이러한 도구들이 무제한적인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허상 안에서 인간관계를 다시 만들며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기술적 모상 안에서의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과 너무나 떨어져 있습니다. 저명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공장에 대량생산 기술이 등장하였을 때 이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공장에 있는 노동자들이 분업화를 통해서 보다 많은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과 함께, 그러한 지루한 작업이 노동자들을 최대한 바보 같고 무지하게 만든다는 것을 인지하였습니다. 스마트 자동차가 더 나은 운전자를 만들까요? 전자레인지가 더 나은 요리사를 만들까요? 인터넷 상의 관계가 더 나은 인간관계를 만들까요? 교종은 이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그는 내가 원하는 대로 취하거나 혹은 버릴 수 있는 관계적 특성을 지닌 온라인 기술을 비판합니다. 결국 이러한 것은 점점 더 지구의 자원들을 착취하도록 만듭니다.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은 교종께서 ‘현대 인간중심주의’라고 부른 두 번째 형태와 병행되었을 때 더욱 파괴적이게 됩니다.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것을 이르는 용어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진 고유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종이 비판하는 것은 ‘현대’입니다. 현대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을 자연 질서 안에서의 고유한 존재라는 위치에 두지 않습니다. 그보다, 자연 질서의 감각으로부터 인간을 완전히 분리시킵니다.
현대 인간중심주의는 ‘자기 모순적’이며 심지어 정신 분열을 일으키게 합니다. 다른 존재들의 고유한 가치를 부인하는 기술 관료주의를 찬양하는 것부터 인간의 그 어떠한 특별한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 반응까지 있습니다(118). 이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방식으로 인간을 가꾸고 보존하면서 자연의 한계 안에서 인간 능력을 합당하게 사용하지 않게 합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제 자리를 되찾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모순된 행동을 하고 맙니다.”(115)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인간이 현실에서 독립된 존재임을 선언하고 절대적 지배자임를 자처한다면, 인간 삶의 기초 자체가 붕괴된다”(117)는 것입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 교종 뿐 아니라 다른 이전의 교종들에게서도 중요하게 지적되었던 생각이었습니다. 현대 인간 중심주의는 자유에 대해 왜곡되고 과장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유는 여러모로 좋은 것이지만 지나치게 확장되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은 자유가 진리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말하였으며, 프란치스코 교종은 인간이 자유를 현실의 감각으로부터 분리시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상의 세계에 사는 것이 마치 자유를 느끼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현대 인간중심주의는 ‘실용적 상대주의’(122)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이것은 우리 일상에서 ‘그릇된 생활양식’(122)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세계관을 심사숙고하면서 일상을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계관이 우리의 삶 안에 들어와 일상으로 굳어가는 것입니다. 교종은 실용적 상대주의를 “즉각적인 이득을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의미 없다고 여기는 것”(122)으로 정의하며,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지구 자원은 무엇이던지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뿐 아니라, 어린이나 노인 무시, 인신매매, 성 착취, 마약 매매, 인간 배아 조작을 하도록 주장하는 이들의 내적 원리로 작용하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깔려있는 주된 생각은 “객관적 진리나 확고한 원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123)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예로 교종은 1장에서와 같이 노동과 생명 공학을 들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과 실용적 상대주의를 멈추게 하기 위해 어딘가에 시작선을 그어야 한다면, 이 영역에서 시작해야합니다.
환경을 위해 일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미국 작가 웬델 베리는 우리가 지구 및 환경과 올바른 관계로 연결되는 진정한 곳은, 한 주간 동안 환경 파괴에 기여하고 주말에 아름다운 주립공원에 가는 것이 아니라, 좋은 노동과 자원의 원천에 대한 존경, 그것이 만들어진 장소, 그것을 만드는 일 그리고 만들어진 것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은 그의 첫 번째 사회 회칙 「노동하는 인간」에서 가치 있는 노동을 좋은 사회를 만드는 중심점으로 잡았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동이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은 현대 인간중심주의에서 말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노동은 더욱 충만한 인간, 더욱 충만한 하느님의 모상이 되기 위한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또한 그것은 인간 존엄성의 가장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좋은 노동은 ‘인간화하는 노동’이지 ‘인간성을 뺏는 노동’이 아닙니다. 우리의 직업이 진정으로 인간적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노동이 인간들을 위한 “좋은 노동”으로 되기 위하여 우리의 산업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좋은 노동은 편한 노동, 직접적인 이윤을 내는 노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주요 문제는 생명 공학에 관한 것입니다. 교종은 식량 생산을 증가시키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로 격렬한 토론의 중심에 있는 GMO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한쪽 편을 들지 않으며, 서로 다른 개별적 상황에서는 일반적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종은 광범위하고 책임 있는 과학적 사회적 토론과 진정한 투명성을 요구합니다. 그는 인간 배아에 대한 유전학적 연구에도 분명한 선을 그어야한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노동과 생명공학 분야에서 성과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앞서 비판한 두 세계관을 염두에 두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발전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를 왜곡된 길로 이끄는 세계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한계’를 존중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자연 속에 주어진 것과 함께 작업하고, 그 모든 것이 선물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를 피상적으로 만족시키는 것들이 세상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일상을 위한 질문들
1. 나의 삶의 영역 중 기술이 지배하는 곳은 어느 부분입니까? 기술이 진정한 인간 발전과 영적 발전에 기여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관리하고 제한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2. 나는 기술을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제하기 위해서 사용합니까? 혹은 다른 창조물들과 관계를 지배하기 위해서입니까? 우리 모두는 다른 무언가를 통제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 교종이 비판하고 있는 나쁜 부류의 통제로 바뀐다고 생각합니까?

3. 나는 어느 때에 -다른 사람들, 지구,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 내 눈 앞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현대 인간중심주의’에 빠져듭니까? 나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단절시키는 이러한 욕구들로부터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기도
하느님은 구약의 인물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너는 땅이 얼마나 넓은지 이해할 수 있느냐?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 (욥 38, 4; 18)
- 하느님이 알고 계시고 하실 수 있는 것들, 하지만 인간은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모든 것들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창조물의 다양성과 복잡함을 존중하기 위해 겸손의 은총을 하느님께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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